言語 위에 덧씌우는 眞心
by 요신
에피쿠로스曰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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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관계지음으로써 존재한다 - 불교 관계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붓다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天上天下有我獨尊이라 오해하여 '이 세상엔 나 홀로 있을 뿐이다.'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세상(天上天下)은 나로부터 말미암는다(唯我獨尊).'가 본 뜻에 가까운 해석이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풀어 보면, '깨달음은 나를 먼저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세상과 관계를 갖고 시작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인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남'이란 무엇인가? 눈, 코, 입, 귀, 감촉, 인식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온 감각을 통해 대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 곧 만남이다. 내 감각과 감각의 대상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관계가 이뤄진다.

 

이러한 만남을 '우주'로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연기(緣起)이다. 모든 것은 만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기에, 원인(과정)이 없으면 결과(현재)가 존재할 수 없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는 비유가 있다. 나락 한 알의 생성과정을 들여다 보면, 우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알맞은 햇볕, 알맞은 바람, 알맞은 수분, 알맞은 토양, 알맞은 시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라도 어긋남 없이 '만나 관계지을 때' 나락 한 알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만나지 않고 생성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의 이치는 인과에 묶여있을 뿐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만은 '인식'이라는 자율성을 띠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함(좋음)과 악함(싫음)을 인식함으로써 매 삶의 순간마다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마저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행위에 따라 '업'이 쌓이고, 이것이 또 어떤 현상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이러한 인식 확장을 거치면, 내 주변의 바람 한 점이라도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이미 나와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by 요신 | 2008/01/01 03:27 | 이러쿵저러쿵 | 트랙백 | 덧글(0)
현대와 종교 세속화


현대(現代)와 종교 세속화


— 근대 생활양식은 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21세기, 우리는 지식정보산업이 크게 발달한 ‘현대사회(現代社會)’에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알고 싶은 지식을 쉽게 습득할 수 있으며, 먼 곳의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사회복지가 발달하여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도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이 강화되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행복이 세속화, 물질화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지식을 쌓고 정보를 얻는 과정이 사회적 성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이 경향은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고, 마침내는 ‘성스러운 영역’으로 그 자리를 굳게 지키던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들어 종교가 사회와 새롭게 관계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이는 것이 그 방증이다. 종교가 인간의 삶 전반에 차지하는 비중과 종교의 거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에 영향을 끼친 근대 생활양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또 근대 생활양식으로 인해 종교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이 글에서는 현대(現代)의 정의를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특징을 통해 드러내고, 근대화ㆍ현대화로 인한 종교의 세속화 양상을 다룬다.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을 발표한 이래로, 인류는 ‘모든 것은 진화한다’는 사고방식을 추구해왔다. 사람들은 종(種)이 진화하는 것과 같이 사회ㆍ정치ㆍ경제 등 사회적 요소들, 즉 인간의 이성(理性)도 진화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품었다. “진화론은 자연스럽게 인문ㆍ사회분야에도 확대 적용되었다.”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인지적 존재로서도 진화할 수 있다는 태도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관을 낳았다. 진화론이 부상(浮上)하고 창조론이 침잠(沈潛)함에 따라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퇴조하고, 그 자리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관’이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17~18세기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쳐 진행되던 사회의 전반적 패러다임 변화를 촉발한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바로 ‘근대 생활양식’이다.


근대 생활양식에서 파생된 ‘현대’의 특징은 다섯 가지로 압축할 수 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속화ㆍ평등ㆍ자유민주주의 태도가 나타난다. “중세시대에는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인간사(人間事)를 얕보고 신과 내세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이러한 경향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 휴머니즘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내세가 아닌 현세의 삶을 지향하는 세속주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다. “세속주의 운동은 보통 반(反)그리스도교적이거나 반종교적 성향을 띄곤 했다.” 현세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신(神, God)과 인간간의 관계보다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인간이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자유민주주의’가 부상한 것이다. 둘째, 비인격적 관계를 통한 개인소외와 개인주의의 확산이다. ‘비인격적 관계’에서 ‘비인격(非人格)’은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이성적인 측면으로만 판단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결국 인간관계의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측면만 강조돼 개인이 내적으로 소외된다. 같은 이유로 자신의 권리가 중요한 만큼 상대방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개인주의도 인간의 ‘합리적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셋째, 욕망의 발현과 소비문화의 일반화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사회의 모든 가치가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대의 이윤을 창출해 내기 위해 개인 간 집단 간 무한경쟁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물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아 ‘욕망의 발현’이 곧 ‘소비’로 이어졌다. 현대인은 마음껏 소비할수록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었다 믿는다. 넷째, 과학의 욕망 수단화이다. 과거 과학기술은 인간이 신의 목소리를 더 가까운 데서 듣기 위해 권면되었다.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신이 창조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해 인체를 공부했다는 것은 유명하며, 유전형질을 발견해낸 멘델(Gregor Johann Mendel)도 수도사 출신이었다. 또한 분자생물학의 시발점이 ‘세상에서 가장 미세한 것에서 신의 섭리를 발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과학적 탐구는 거룩한 행위과정의 일부였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현재 과학은 ‘더 많은 부(副)’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수의과 석좌교수의 연구업적에 대한 국내의 뜨거웠던 반응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로지 경제적 측면으로 부각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다섯째, 법의 성격이 변하였다. 원래 법은 ‘윤리적 문제’ 나아가 ‘종교’와 떨어질 수 없는 체제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불효자’를 곤장형에 쳐했던 것도 ‘불효’가 유교적 윤리구조 아래에서 비윤리적인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윤리적 문제’를 다루던 법은 근대 이후 ‘개개인의 상충하는 이해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격하되었다.


이러한 근대 생활양식은 종교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대체한다. “종교는 삶과 죽음, 죄와 용서, 고통과 행복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맞부딪치는 ‘궁극적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하면서 인간 삶의 출발과 끝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종교의 위상은 종교에서 다루던 문제를 종교 외적인 곳으로 흩어버린다. 즉,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궁구는 과학의 실증적 영역으로, 죄와 용서는 법적 영역으로, 고통과 행복의 문제는 물질 만능주의로 대체된다.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신앙과 믿음’에서 ‘논리적 이성’으로 전환된 것이다.


한편, 종교의 위상은 역사주의에 의해 더욱 흔들리게 된다. 역사주의는 “모든 사상을 역사적 생성과정으로 보고 그 가치 및 진리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다는 시각”이다. 역사주의는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史觀)에도 영향을 받아, “과거에 대한 진술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역사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사조를 낳았다. 그 결과, 경전의 역사성을 중시한 그리스도교 등 종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경전의 권위를 손상하는 고고학적 연구결과가 드물지 않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렇듯 종교의 위상이 근대 이전과 달라짐에 따라 종교의 세속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쉬너(L. Shiner)는 종교의 세속화 형태를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종교의 쇠퇴'decline of religion)이다. 이것은 종교가 그 신도 수, 성직자수, 그리고 종교조직의 수에 있어서 감소가 이루어지며, 종교적 관심과 참여율도 감소되고, 종교적 사고와 수행, 그리고 종교제도의 사회적 중요성이 약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현재 유럽의 교회가 대표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통계에 따르면 영국인의 11%, 독일인의 12%만이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1세기동안 꾸준히 신도 수가 줄고 있다.” 주말마다 사람이 붐비는 대성당은 신자가 아니라 관광객들로 가득 찬다.
독일의 한 여론조사 기관이 30세 미만 시민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보라고 묻자 ‘교황’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은 11%에 그쳐 미국 가수 셰어보다 불과 1% 포인트 많았던 사례도 있다.둘째, '이 세상과의 동조'(conformity with this world)이다. 이것은 종교조직의 제도화, 합리성의 증가로 종교적인 것이 이 세상적인 것을 닮아 가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는 한국의 조계종에서 잘 드러난다. 조계종의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정식으로 불교학을 이수해야 하고,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승급시험에 합격해야 더 높은 직위를 받을 수 있다. 이는 거대한 관료제 조직에서 시험을 통해 사원을 승진시키는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셋째는 '종교로부터의 사회 이탈'(disengagement of society from religion)이다. 이것은 사회가 제도적인 면에서, 그리고 지적인 면에서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이탈하여 사회 자체가 하나의 자율적인 실재가 되는 것이다. 넷째는 '종교적 신앙과 제도의 변형'(transposition of religious beliefs and institution)이다. 이것은 한 때 신적인 능력과 힘에 근거되고 있다고 이해되었던 지식, 행위유형, 제도적 장치가 순수한 인간적 창조와 책임성의 현상으로 변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가 집필한 전기 「예수의 생애」는 철저히 인간 예수를 그려낸다. 작중에서 예수는 전능한 삼위일체의 대리인이라는 이미지를 풍기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서 예수는 못 생기고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생각이 깊을 뿐인데, 이는 ‘삼위일체’를 정통론으로 두고 있는 기존의 종교 입장과는 큰 차이가 난다. 다섯째는 '세계의 비성화(非聖化)'(desacralization of the world)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이 합리적이고 인과적인 설명이나 통제의 대상이 됨으로써 세계가 점차 그 거룩한 성격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여섯째는 '거룩한' 사회에서 '세속적' 사회로의 이행(移行)(movement from a 'sacred' to a 'secular' society)이다. 이것은 종교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공동사회 혹은 전통사회에서 그것이 약화되는 이익사회 혹은 도시사회로 변화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도시 위주의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활동이 없이는 어떤 위치에 있든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만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회’에서는 성직활동도 일반 노동활동과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과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직접적인 경제활동과 동떨어진 생활을 했던 성직자의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쉬너(L. Shiner)의 연구와 같이 종교의 세속화는 현대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종교의 세속화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각종 신흥종교의 등장과 확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또, 설령 종교가 세속화되었다 하여도 종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이 크기에, 무조건적인 반발이나 무비판적인 관조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의 세속화’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종교가 ‘일반인이 논하기 어려운 특별한 위치’에서 ‘누구든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대(現代)의 정의를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특징을 통해 보고, 근대화ㆍ현대화로 인한 종교의 세속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종교의 위상은 날로 추락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에서 종교를 도외시해도 될 것인가? 우리는 종교의 기본적인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종교는 삶과 죽음, 죄와 용서, 고통과 행복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맞부딪치는 ‘궁극적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하면서 인간 삶의 출발과 끝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의 삶에 ‘의미’가 결여된다면, 어떤 인간이 행복할 것인가.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삶의 의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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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종교가 비판의 대상으로 격하되었다’는 통상적인 공식을 단순히 일반화하는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이슬람 세계에는 이러한 시각을 적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의 종교 양상은 개별 국가마다 큰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꾸란에 대한 경외가 남다르므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여기서 논한 ‘현대’와 ‘세속화’는 어디까지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한다. 여기서 논의하는 바는 현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과 관련이 있다.

by 요신 | 2007/06/01 04:19 | 내게비친 | 트랙백 | 덧글(4)
김승희, <길 없는 길 위에서>

길 없는 길 위에서

 

김승희

 

역촌동 -> 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버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색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 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고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가는

가을바람

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조각

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 같이 멀미 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

 

우울의 극치를 치닫는 시인데,

왜일까

난 이 시를 읽고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이걸 반면교사 삼았다고 해야 할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행복한 길과

행복한 사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달까.

 

때로는 길 없는 길이 더 좋기도 하다.

어디서

어떤

보물 같은 녀석이 튀어나와

내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해줄지 알까.

 

:-)

by 요신 | 2007/06/01 04:12 | 보고듣고읽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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