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어떠한 환경에서 태어나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든, 어떠한 모습으로 죽든, 인간의 삶이란 결국 탄생하여 죽음으로써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탄생을 결정한 인간이 있던가? 스스로 원해서 죽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결국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 유한한 ‘삶 속에 던져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작중인물인 키팅 선생은 그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말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재를 즐기며 살라는 말이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현재를 즐겨라! 너희의 삶을 멋지게 만들어라!(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며 이 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학교규칙에 얽매여 오로지 사회적 성공(成功)만을 좇고 있는 학생들이 자신의 혼(魂)을 찾아내도록 이끌어내려 노력한다. 수많은 과제와 어려운 어학공부에 시달려온 명문 사립학교 학생들은 그들 통해서 ‘자유정신’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키팅 선생은 문학을 교수(敎授)하며 여러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문학은 분석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문학 교과서 서문을 ‘쓰레기’라고 매도하며 찢어버리라 한다. 그리고 문학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설명한다. 우리가 시(詩)를 공부하는 것은 인간(人間, Human)이기 때문이며 시는 기술(技術)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는 문학, 즉 영혼의 자유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 말로 참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세상을 책상에서 학생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라며 교탁 위에 올라서도록 이끌기도 하고, 야외수업을 하며 ‘발맞춰 걷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우리는 세 사람만 같이 걸어도 어느새 발을 맞춰 가려고 애쓴다. 그러지 마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라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길을 걷도록 종용(慫慂)하는 그의 수업방식은 학교 측과 갈등을 형성한다. 학교의 한 교사는 키팅 선생에게 ‘학생들을 예술가로 만들지 마시오. 몽상에 빠져들게 하지 마시오.’라고 경고한다. 결국 교내외로 팽배해지는 권위와 파격 간의 갈등은 큰 비극을 낳고 키팅 선생은 학교에서 떠나는 결말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키팅 선생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들은 학교를 나서는 키팅 선생을 향해,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 서서 ‘Captain, oh my captain!'을 외친다. 그들의 외침이야 말로 자유의지를 향한 학생들의 첫 발돋움일 것이리라.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시인(詩人)이다. 시(詩)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본성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사실 그렇게 예술적이지 않다. 우리는 수많은 규칙과 규범 등에 얽매여 있을 뿐 아니라 성공(成功)이란 명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품고 살아가지 않는가? 창조적인 걸음을 걸을 수 있음에도 옆 사람에 보조를 맞춰, 같은 발을 내딛고 있지는 않은가? 교탁 위에, 혹은 책상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에도 걸상에서 엉덩이 떼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지만, 절반의 시인에 불과하다. 산 시인(Alive Poet)이 아니라 죽은 시인(Dead Poet)인 셈이다. 죽은 시인이 만든 사회는 경직돼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에 충실할 때, 지금을 즐길 때, 사회에는 생기(生氣)가 감돌 것이다. 사막의 선인장은 단 몇 방울의 물로도 수십 일 동안 그 푸름을 간직한다. 키팅 선생이 강조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우리에게 그런 물방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