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語 위에 덧씌우는 眞心
by 요신
에피쿠로스曰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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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내노인요양원 봉사 후기.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어떠한 환경에서 태어나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든, 어떠한 모습으로 죽든, 인간의 삶이란 결국 탄생하여 죽음으로써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탄생을 결정한 인간이 있던가? 스스로 원해서 죽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결국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 유한한 ‘삶 속에 던져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살면서 맺어가는 관계(關係)일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자(他者)와 만나 관계를 맺는다. ‘내’가 관계를 맺어온 부모님, 선생님, 친구, 동료, 동기, 선배, 후배 등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관계의 연속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비록 스스로 의도한 바가 아니라 학교 커리큘럼에 의한 활동이었지만, 이번에 ‘사랑나누기’를 통해 봉사활동을 가게 된 ‘신내노인요양원’에서도 새로운 사람들과 만난다는 데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과 경험해보지 않은 생활 방식에 대해 체험한다는 것에 약간 흥분된 마음도 있었다. 관계야 말로 내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그런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신내노인요양원은 흰색으로 칠해진 5층 건물로, 6호선 봉화산역에 위치해 있었다. 요양원은 가톨릭계 꽃동네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층마다 상태‧상황이 다른 노인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관리 또한 독립적으로 이뤄지는 듯했다. 같은 날 봉사활동을 하기로 한 사람들과 함께 머물다가 기관 담당 수녀님의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들었다. 우리는 각기 담당 층을 배정받아 흩어졌다. 내가 봉사구역으로 배정받은 곳은 건물의 2층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머무는 공간이었다. 요양원 전체엔 할머니가 더 많다 하였는데, 2층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간의 성비(性比)가 얼추 균형을 이루는 것 같았다. 어르신들은 노환, 뇌졸중으로 인한 반신마비, 의사소통장애 등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건물 안이 전반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간간이 TV에서 웃음소리가 나오는 것을 빼곤 왁자지껄한 소음은 없었다. 요양원 측에선 주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를 ‘면회일’로 지정해 어르신들의 친지들과의 만남을 열어두고 있었지만, 평소에도 그런지 내가 간 그날만 그랬는지 어르신들을 면회 온 사람들은 마주치지 못했다. 그에 대한 상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어, 말없이 지나가는 어르신들과 마주치면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화장실 청소와 어르신들의 목욕, 탈의 및 착의, 점심 배급을 도왔다. 내가 손을 거들은 일을 나열하니 꽤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사실 초짜답게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의욕은 있었으나, 어르신들을 ‘잘 모르는’ 까닭이었다. 어르신들의 목욕이 끝나고 옷을 입혀 드릴 때 있었던 일들만 해도 그렇다. 어떤 노인은 꼭 상의에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어야 한다며 토라지고, 또 다른 노인은 미끄럼방지처리가 된 양말이 아니면 신기 싫다고 내가 건넨 양말을 집어던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식사 배급 때,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수십 명의 식습관 및 취향, 치아 상태까지 고려해 일일이 배식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어르신들의 면박과 야단에도, 내가 움직이는 내내 싱글거리고 다녔다는 점이다. 분명히 일은 쉽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었기에 더욱 고단했는데도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요구를 하나하나 들어드릴 때마다 만족스런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어르신들의 얼굴에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웃으며 ‘할아버지, 이제 만족하셨어요? 더 시키실 일은 없나요?’라고 묻는 내게 그분들은 순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뒤로는 불편한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복도를 걷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먼저 웃어 보이시니, 어찌 내가 얼굴을 찡그릴 수 있었으랴. 정해진 봉사시간이 지나 다시 1층으로 내려갈 때 마주친 몇 분께 ‘이제 갑니다. 오늘 밤 편히 쉬세요.’하고 인사하니 역시나 웃는 낯으로 끄덕끄덕하시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날 누가 먼저 웃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내가 처음부터 웃으면서 어르신들에게 다가갔던 것인지, 아니면 초짜인 내 실수를 본 어르신들이 어처구니없어 웃으신 것인지 명확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분명 먼저 미소를 보인 사람—나였을 지도 모를—이 있었고, 미소는 미소로써 대답 받았다. ‘서로 좋은 관계’란 게 바로 이런 것 아닌가! 미소로써 묻고, 미소로써 답하는 교류만큼 기분 좋은 건 드물지 않을까 싶었다.

기분 좋은, 피곤하지만 더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에 균열이 간 것은 처음에 모였던 장소에 모여 기관 담당 수녀님의 ‘하루 정리’를 들은 때였다.

“어르신들과 짝꿍 맺었나요? 서로 이름 알게 된 어르신은 얼마나 되나요?”

우리 대부분의 답변은 ‘아니요, 한 분도 없습니다.’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마주보고 인사하고 서로 웃어 보인 사람들임에도,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함자(銜字)’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답변에 수녀님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이 어르신들의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그건 봉사가 아니라 노동에 불과합니다. 비록 제가 미리 ‘짝꿍을 맺도록 하세요.’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봉사라면 모름지기 봉사자와 그 대상이 함께 웃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서로 미소 띤 얼굴을 보였다고, 교류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이름을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어찌 교류라 할 수 있고, 어찌 제대로 된 소통이라 할 수 있을까. 삶 속에 던져진 존재들끼리 서로 ‘이름’을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내가 앞에서 밝힌 ‘관계(關係)’의 첫 단계가 아닌가. 나는 요양원에서 나름대로 친절하게 어르신들을 대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가짐에 부족함이 많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는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면서도 정작 다른 사람과 이름을 주고받는 것에는 인색한 편이지는 않았는가? 문득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는 ‘한 걸음’이 필요하다. 이름을 주고받는 것이 그 한 걸음이라면, 나는 아직도 요양원의 어르신들에게 한 발짝도 가까이 가지 않은 셈이다. 그래도 아직 그분들을 만날 날은 남아있다. 다음 기회에는, 안면(顔面)만 익혔던 어르신들께 여쭤보리라. ‘할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되세요?’하고.

by 요신 | 2007/04/02 02:41 | 내게비친 | 트랙백 | 덧글(4)
피터 위어, <Dead Poet's Society>, 1989.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어떠한 환경에서 태어나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든, 어떠한 모습으로 죽든, 인간의 삶이란 결국 탄생하여 죽음으로써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탄생을 결정한 인간이 있던가? 스스로 원해서 죽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결국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 유한한 ‘삶 속에 던져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작중인물인 키팅 선생은 그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말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재를 즐기며 살라는 말이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현재를 즐겨라! 너희의 삶을 멋지게 만들어라!(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며 이 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학교규칙에 얽매여 오로지 사회적 성공(成功)만을 좇고 있는 학생들이 자신의 혼(魂)을 찾아내도록 이끌어내려 노력한다. 수많은 과제와 어려운 어학공부에 시달려온 명문 사립학교 학생들은 그들 통해서 ‘자유정신’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키팅 선생은 문학을 교수(敎授)하며 여러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문학은 분석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문학 교과서 서문을 ‘쓰레기’라고 매도하며 찢어버리라 한다. 그리고 문학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설명한다. 우리가 시(詩)를 공부하는 것은 인간(人間, Human)이기 때문이며 시는 기술(技術)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는 문학, 즉 영혼의 자유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 말로 참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세상을 책상에서 학생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라며 교탁 위에 올라서도록 이끌기도 하고, 야외수업을 하며 ‘발맞춰 걷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우리는 세 사람만 같이 걸어도 어느새 발을 맞춰 가려고 애쓴다. 그러지 마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라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길을 걷도록 종용(慫慂)하는 그의 수업방식은 학교 측과 갈등을 형성한다. 학교의 한 교사는 키팅 선생에게 ‘학생들을 예술가로 만들지 마시오. 몽상에 빠져들게 하지 마시오.’라고 경고한다. 결국 교내외로 팽배해지는 권위와 파격 간의 갈등은 큰 비극을 낳고 키팅 선생은 학교에서 떠나는 결말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키팅 선생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들은 학교를 나서는 키팅 선생을 향해,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 서서 ‘Captain, oh my captain!'을 외친다. 그들의 외침이야 말로 자유의지를 향한 학생들의 첫 발돋움일 것이리라.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시인(詩人)이다. 시(詩)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본성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사실 그렇게 예술적이지 않다. 우리는 수많은 규칙과 규범 등에 얽매여 있을 뿐 아니라 성공(成功)이란 명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품고 살아가지 않는가? 창조적인 걸음을 걸을 수 있음에도 옆 사람에 보조를 맞춰, 같은 발을 내딛고 있지는 않은가? 교탁 위에, 혹은 책상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에도 걸상에서 엉덩이 떼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지만, 절반의 시인에 불과하다. 산 시인(Alive Poet)이 아니라 죽은 시인(Dead Poet)인 셈이다. 죽은 시인이 만든 사회는 경직돼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에 충실할 때, 지금을 즐길 때, 사회에는 생기(生氣)가 감돌 것이다. 사막의 선인장은 단 몇 방울의 물로도 수십 일 동안 그 푸름을 간직한다. 키팅 선생이 강조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우리에게 그런 물방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by 요신 | 2007/04/02 01:45 | 보고듣고읽는 | 트랙백 | 덧글(4)
키쉴롭스키, <Decalogue I>, 1988.


크리스천이 아닌 내가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 혹은 ‘하느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주제의 영화를 보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화를 감상하기에 앞선 이러한 소고(小考)는 미지(未知)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보단 다른 사람들이 쌓아놓은 확신에 찬 세계에 압도되지 않을까하는 불안에 기인한 바가 컸다. 그러나 영화의 프레임이 하나 둘 지나감에 따라, 나는 내 불안이 기우(杞憂)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영화 <십계>는 한 종교의 계율을 기초로 한 영화일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평범한 인간의 삶 자체로써 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어느 평범한 마을, 어린 아이 파웰은 컴퓨터언어학 교수인 아버지 크르지스토프와 함께 산다. 크르지스토프는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인 방식을 통해 어떠한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추운 겨울, 파웰은 가게를 갔다 오다가 얼어 죽은 개를 보고 연민을 느끼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죽음과 영혼에 대해 묻는다. 크르지스토프는 아들의 질문에 죽음이란 육체적 경직상태에 불과하며 영혼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는 ‘그럼 아빠는 무얼 믿느냐’는 아들의 물음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 잠시 후 파웰은 고모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고모는 영혼과 사랑은 실재하며 따뜻한 것들이라 말해준다. 그리고 신은 믿음이 있는 자리에 있다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파웰은 아버지와 함께 컴퓨터와 수학 계산을 하며 생활하는 한편 고모에게 가톨릭 교리반에 드는 것을 제의받고, 크르지스토프는 탐탁지 않아하면서도 허락한다. 한편 파웰은 아버지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발견하고, 그것이 스케이트임을 알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이는 날이 밝으면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생각에 잠을 못 이루고,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을 위해 컴퓨터에 기상정보를 입력하고 ‘안전하다’는 결과에 만족한다. 밖에서 직접 얼음을 두드려보기까지 한 그는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도 될 만하다고 확신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재운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컴퓨터 계산도, 자신의 예상도 비웃듯이 마을 연못의 얼음이 깨졌으며 스케이트를 타고 놀던 아이들이 큰일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렇지 않아도 잉크병이 깨진 데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그는 아이를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연못에 빠져 죽은 아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오열한다.

영화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성에 대해 확신하던 한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비극’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불완전한 대상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야 말로 인간 비극의 원흉(元兇)인 것일까? 진정으로 완전한 대상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인간을 삶의 고통과 비극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밧줄인 것일까?

인간에게 세상은 작중(作中)의 얼음판과 같다. 사람들은 혹여 미끄러지지 않을까 주의하며 걸음을 떼며, 앞길의 얼음이 얇아 보이면 지팡이로 툭툭 쳐가며 위험을 피해가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주의 깊게 빙판을 걷더라도 언제 어떤 계기로 미끄러져 넘어질지, 얼음이 언제 깨어져서 얼음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다. 인간에게 ‘위험’과 ‘죽음’이란 언제나 열려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겐 주변을 살피는 냉철한 이성 이외에 다른 감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성에 대한 경계’와 ‘어떤 절대성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아무리 첨단(尖端)에 있는 이성이라도 필연적으로 불확실할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대상을 향한 신앙이 없는 이일 지라도 보이지 않는 절대성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감성은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본성을 외면하지 않는 한 인간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작중(作中)에서 ‘주시(注視)하고 눈물 흘리는 신(神, God)’으로 보이는 ‘신비의 사나이’가 자리를 비운 후에도 열기를 피워내고 있던 모닥불처럼, 인간이 억지로 피하지 않는 한 희망은 추운 겨울에도 따뜻할 것임이 틀림없다.

 

by 요신 | 2007/04/02 01:40 | 보고듣고읽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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